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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피론주의자들의 목표는 마음의 평정, 즉 아타락시아였다. 그리고 아타락시아를 가능하게 하는 필요조건으로 그들이 내세운 것이 판단유보였다. 일체의 결정을 유보함으로써 그들은 모든 불안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삶을 향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과연 그들의 말대로 아타락시아는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런 삶은 어떤 종류의 것일까? 아타락시아의 철학적 의의는 무엇인가? 이런 물음들이 이 논문에서 다루려고 하는 주제이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피론주의자가 택한 행위의 기준이 현상이며, 이 현상의 강제성에 수동적으로 따름으로써 행위자는 아타락시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이로써 그는 피론주의자가 비행동적이지도 않으며 비일관적이지도 않음을 보였다고 자신하였다. 그러나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주장대로 아타락시아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피론주의자가 목표로 하는 아타락시아의 삶은 강고한 현실에 예속된 삶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피론주의자가 판단유보를 이론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실천영역에서도 관철하려면, 그 대가로 그는 삶에 대한 비판적 반성이 결여된 뿌리 없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반대로 아타락시아의 의의를 독단주의에 대한 치유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피론주의의 이론의 철저함은 부차적인 문제로 격하되고 만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자기 이론의 정합성을 해치는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론과 실천에서 철저한 판단유보를 유지하려고 하는 한, 다시 그는 철저하게 현실에 순응하는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The goal of the ancient pyrrhonists was an unperturbedness of the mind, ataraxia. They said that it was suspension of judgement, i.e. epochē, which made ataraxia possible. According to them, we were brought firstly to a state of mental suspence and next to a state of unperturbedness. So we would enjoy happy life free from every anxiety by suspending judgement of all things. Is ataraxia possible as they said? If so, what kind of life is that? What is the philosophical significance of ataraxia? These questions are the topics I will discuss in this paper. Sextus Empiricus emphasized that the criterion of sceptics was appearance and that an agent was able to reach ataraxia by following passively the compulsory pathos of appearance. So by this way, he had great confidence that the sceptics had shown themselves to be neither inactive nor inconsistent. But even if ataraxia is possible, I think that the ataraxia life is only a zombi life subordinate to dominant reality. In order for sceptics to carry out the epochē not only in the field of (pure) theory but also in the field of practical life, they have to live a rootless life lacking critical reflection on life. On the contrary, if the significance of ataraxia is to be sought in the healing of sick dogmatists, damage to the consistency of skepticism is inevitable. It will be very difficult for Sextus Empircus to accept this interpretation because it undermines the coherence of his scepticism. However, as long as he does not want to give up radical epochē in theory and practice, he will have to accept the passively conforming life again.

목차

한글요약
Ⅰ. 고대 피론주의자의 최종 목표: 마음의 평정
Ⅱ. 판단유보로 인도하는 방법: 등치
Ⅲ. 스토아학파의 반론: 행위 불가능성
Ⅳ. 피론주의자의 해결책: 현상에 대한 수동성과 양육 환경
Ⅴ. 아타락시아의 가능성: 철저하게 순응하는 삶
Ⅵ. 아타락시아의 의의: 독단주의에 대한 치유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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