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stract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기억은 한편으로는 과거의 충실한 보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자유로운 변형이라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면모를 가진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런데 기억을 외부로부터의 지각 인상이 우리의 마음에 남긴 흔적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밀랍 각인 모델에서는 기억의 이 양면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기억의 존재 방식에 대한 새로운 모델이 요구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우리의 가설은,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1장에 제시된 이미지 개념을 확장하여, 베르그손의 본의와 반대로 기억 또한 지각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로 보고, 기억과 지각의 차이를 동일한 이미지들의 상이한 관계 체계들에서 찾는 데 있다. 이에 따를 때, 기억의 충실한 보존은 이미지들이 시간 순서에 따라 맺는 관계와 관련 되며, 반대로 기억의 가변적 재생은 동일한 기억 이미지가 지각적 이미지 체계와 인접과 유사의 논리에 따라 연결되는 데에서 성립한다. 그런데 베르그손이 설명하는 인접과 유사는 구조주의 언어학자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에 대한 설명과 일치한다. 따라서, 기억의 가변적 변형은 기억 이미지 자체의 변형이 아니라, 기억 이미지들이 은유와 환유의 ‘언어논리’에 따라 지각 이미지들과 관계 맺게 됨으로써 생겨나는 ‘의미’ 차원의 변형이다. 이렇게 해서, 본 연구는 기억의 충실한 보존과 자유로운 가변성의 양면성을 기억 이미지 자체와 기억 이미지들이 언어논리에 따라 맺는 관계라는 두 차원을 구분함으로써 해명한다.